아, 고단한 긴 시간이 많이 이어져 왔구나.

나도 어느 땐가는 과거를 회상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우울했던 기억들보다는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리

라.

 

 현과 현이 서로에게 응답하듯이

그렇게 살아 볼 일.

말년의 스메타나의 삶.

음악을 들으며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 날이여.

결코 가벼울 수 만은 없는 나날들.

 

 그래 날마다 다시 시작하는거지.

남은 삶에 대한 계획이나 세워 볼꺼나.

 

 

 알반베르크 현악4중주단, 비엔나콘서트 라이브 앨범.(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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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비 내린 후의 나른한 오후 한 때가 지나갔지요.

오후의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 저녁 먹고

시간을 끌고 있었지요.

서늘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늘상처럼 몸을 움직여

천변을 뛰었지요.

아침까지 내린 비로 물은 그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여 소리 내어 울고 그 분노로 인해 몸에서 김이 서려 올랐지

요.
일시에 강둑은 넓어지고

무서운 기세로 그것은 흘러 들어갑니다.

7시 넘어서 뛴 탓으로 날은 쉬 어두워지고

아하, 계절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지요.

노오란 달빛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가

한 곳에 지나치니 훅하니 숨막히는 후각의 향연을 느꼈지요.

 그리고 한 편 더 어두워 가면서,

자그마한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보았지요.

이름하여 꽁무니에서 빛을 내는 개똥벌레들.

반짝이면서 마치 밤 유영하는 모습에 신기해하면서

가던 발걸음 멈추고 손 내어 허공을 향해 잡으려고

휘저어 봅니다. 물가 군데군데에서 작은 움직임의 빛이

발하고 이렇게 계절은 깊어가는 것인지요.

  그리고 어둠으로 인한 주변 숲의 변화.

때론 그것은 빛의 요술로 인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가

동물의 모습이 되었다가 아님, 상상력이라는 인자로 인해

무수히 머릿속에서 여러 형태로 만들어졌다가 다시금 생성이 됩

니다.

  간혹 마주 오는 차의 빛이 주변의 숲을 비쳐 여러 모습으로 만

들고
교교한 물소리, 움직이고 있는 발자국 소리, 반딧불의 움직

임.

 계속으로 변하는 마음과 같은 숲의 모습이 오늘 어스름의 풍경

이지요.

집에서 어딘가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점차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약해지는 것은 밤이 깊어 가기 때문

이겠지요.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빼꼭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지요.

문은 열어 놓았지만 선선한 기운은 몰려 들지 않고.

둑방길 걸으며 바람소리에다 물의 기운까지 느껴 볼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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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울산바위기(나드리길)

  첫째 날(2005.08.07. 토, 춘천-서석-구룡령-양양-설악동-울산바위 가는 길 중간 쉼터)

   8월 7일 저녁 20시 실내암장에서 동행인을 만나다. 실내암장에서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점검하고 빠진 부식거리 등을 확인하고 코렉스마트에 들려 필요한 것을 사서 출발하니 21시. 휴가철인 점을 고려하여 홍천 서석을 경유하여 구룡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는 노선을 택하였다. 고속도로를 타고 홍천에서 우회도로를 타니 작년까지 다녔던 길들이 눈에 익숙하다. 서석까지 조금 차가 보이더니 구룡령 들어서는 길이 널널하다. 마음은 이미 등반 대상지인 울산바위에 가 있고, 그곳에 대한 긴 사념에 잠긴다.

  우리나라 거대 암벽등반 대상지로 89년도 록파티 산악회에 의해 개척된 곳. 3박4일 소요되는 돌잔치길, 2박3일의 하나되는 길, 1박2일의 나들이길 등의 크게 3개의 등반루트를 가지고 있는 곳. 미시령 길을 오르면서 차창 너머로 비추는 바위들의 우뚝 솟은 모습은 암벽등반을 하는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곳. 우리는 설렘을 안고 지금 그곳을 가는 것이다.

  막히지 않은 길을 선택한 덕분에 밤 23시 30분 조금 지나 설악동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시키고 주섬주섬 정리하고 짐을 싸들고 울산바위가 있는 신흥사 쪽으로 이동한다. 출발 전에 헤드램프를 점검했건만 밧데리가 소모되었는지 흐릿하다. 그리고 얼마만의 야간산행인가를 생각해 보니 불빛은 가물거리고 결국은 동행인의 손전등 하나 빌려 오른다. 길 왼쪽의 신흥사 문은 닫혀 있고, 외등만이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이들을 인도한다. 조금 지나 다리 위에서 물가 쪽의 비박지를 살피다가 물소리가 시끄러울 것 같아 조금 더 오르기로 한다. 숲 주변이여서인지 밤길 어둡고 한 편으로는 별들이 총총하다. 첫 상가지점에서 시간 관계 등 을 고려하여 비박하기로 결정하고 메트레스 깔고 침낭커버 꺼내서 잘 준비를 한다. 코렉스마트에서 장 봐두었던 튀김과 순대 꺼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잠이 든다.

  둘째 날(나드리길 릿지 등반: 지옥문 동굴-전망대 철계단-누운 바위 동굴)

  아침 일찍 지나가는 탐방객들로 인해 눈이 떠지다. 햇반 2개 데우고 우거지 봉지국을 먹으니 눈앞이 환해진다. 짐 정리하고 다시 오르면서 본 아침 울산바위의 위용. 가벼운 흥분이 일면서 다시 가슴이 설레임을 느낀다. 계조암 밑의 상가에서 1.5 패트병과 날지 물병에 물을 채우고 들머리를 찾는다. 상가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사람 기척이 난다. 그래서 가보니 스님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등반 대상지의 들머리인 지옥문을 물으니 지옥문에 가서 무엇을 하느냐며 반문을 한다. 바위에 접근해서 우측으로 트래버스해서 내려 오니 제1지점인 지옥문이 떡하니 앞에 버티고 서 있다. 울산바위 동남쪽 가장 끝 부분에 있는 큰 동굴인 지옥문은 3개의 등반루트가 시작되는 곳이다. 지옥문 이 이름을 돌이켜 생각하건데 울산바위 등반 자체가 지옥에서 겪는 갖은 고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행인 출발 들머리를 찾지 못해 책을 보고 찾고 있던 중 굴을 지나 돌잔치 길을 등반 중인 여성 두 사람에게 물으니 나들이길의 출발은 우측 숲지대 입구로 가야한단다. 클라이밍 다운을 할까 생각을 하다가 배낭의 무게를 고려하여 나무에 로프를 걸고 하강을 한다. 좌우를 둘러 봐도 출발지점 표시는 없고 다시 책을 꺼내 놓고 주변의 지형을 확인하고 오르기 시작한다. 경사는 진데다가 밑의 바위는 푸석하고 잡을 홀드조차 없고 간신히 오르니 큰 동굴이 앞을 막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어둡고 습한 상태로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몹시 두려워 할 것이다. 동굴을 통과하니 또 다른 우측으로 40도 정도 경사진 좁은 동굴이 기다리고 있다. 동행인 먼저 안 나오는 자세에 끙끙거리며 먼저 올라가고 나는 밑에서 배낭 집어 올리고 습한 동굴 습도와 열기로 인해 안경에 김이 서리고 닫힌 좁은 동굴에서 숨은 턱턱 막혀 온다. 간신히 동굴을 빠져 나오니 우측에 반 침니가 기다리고 있고 동행인이 선등을 하여 오르고 줄을 내려서 배낭을 끌어올린다. 중간쯤 가다 바위 턱부분에 걸려서 힘 주어 잡아당기니 아이고 내 배낭 멜빵 사이 연결고리의 실밥이 툭하니 터지면서 배낭이 허공 중에 내동댕이 쳐진다. 한편 사람 손이 안 미치는 곳에 떨어진 것이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는다. 가로로 묶은 빨래판 메트리스는 양쪽이 서서히 닳고 있고 손바닥도 거친 화강암 때문에 아려온다. 결국은 쥬마를 이용하여 등반하는데 배낭의 무게로 인해 숨이 턱턱 막힌다. 전망대 전까지의 루트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길 찾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동행인이 나중에 다시 갈 때 스프레이 들고 가서 우리가 길 찾지 못해서 헤매이던 곳에 표시를 하자고 제안을 한다. 결국은 3봉과 4봉 사이의 안부 지점에 도착하여 초코렛에다 양갱 먹으며 점심을 때운다. 이때 동행인이 더덕주 한 잔 하자며 꺼냈고 향그런 술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배낭 속을 뒤지니 암장에서 가져왔던 복숭아 4개가 갈라지고 터져 있다. 양호한 것만 먹고 나머지는 산짐승들을 위해 보시한다. 멀리 속초 시내의 정경과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미시령 쪽으론 도로 공사가 한창 중이다. 햇볕은 내려 쬐이고 모자를 쓰고 안 쓰던 헬멧까지 쓰니 갑갑하다. 다시 오름짓하는 중 결국 동행인 신발이 밀려서 왼쪽 창을 뜯어내고 오르다보니 대형 촉스톤이 보이고 그 아래 울산바위 철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인다. 하강하기 위해 로프를 던지고 동행인이 먼저 하강하고 완료 후 하강하려 하는데 오버행이어서인지 자세가 영 안나오고 배낭 무게로 인해서 뒤로 홱 제쳐진 어정쩡한 상태에서 하강을 마쳤다.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멀리하고 보니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오르고 있다. 전망대까지 철계단을 오르다가 등반하고 하산 중인 두 팀을 만나 서로 수인사하고 다시 돌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에서 암벽장비를 착용한 우리의 모습에 관광 왔던 외국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칡즙 두 잔 사서 마시며 다시 우리가 가야할 곳을 응시한다. 하늘을 푸르고 맑으며 멀리 중청과 대청봉은 구름에 가려 희미하다. 우리가 전 번에 갔던 천화대 쪽을 찾아보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권금성 쪽으론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다.

  잠깐의 휴식 후 아래 전망대로 출발한다. 이곳부터는 나들이 길을 알리는 노란색 화살표 표시가 나 있어서 앞부분보다는 길 찾기가 수월하다. 8봉 쪽 좌측 침니 쪽으로 클라이밍 다운하고 슬랩 쪽을 클라이밍 다운을 하니 넓은 테라스 지대가 나타난다. 하강하는 지점에서 살피니 하강용 볼트와 와이어를 새로 설치해 놓았다. 그전 신문 지상을 통해서 보니 처음 이곳을 개척한 록파티 산악회에서 볼트 정리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개척한 곳에 다시 와서 주변의 확보물들을 다시 정비하는 그들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좌측으로는 깊이 10여미터 이상이 되는 크레바스가 보이고 동행인 크랙에다 프랜드 설치하고 건너가서 로프를 픽스하여 배낭 먼저 보내고 나중에 내가 통과한다. 좁은 동굴을 통과하고 나니 안내 방향을 알리는 노란색 표식이 안 보인다. 동행인이 앉아서 또 책을 들여다보고 좌우로 아무리 들여다봐도 등반해야 할 길만 보이지 릿지길은 보이지 않는다. 좌우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은 노란 표식이 머리 위에 있음을 알고 서로가 실소하며 오른다. 하늘은 흐려 있고 드디어는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바람이 일고 먼 곳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들린다. 마땅히 비 피할 곳도 없어서 계속 진행하다가 약간의 처마가 진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한다. 나중에 생각하건데 이때 캠프싸이트 및 오아시스 지점을 지나친 것 같다. 바람을 타고 비는 줄줄 내리고 가깝게만 보이던 속초 시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비는 점점 거세어진다. 한편으로는 오늘밤 숙박지와 비가 계속될 경우 내일의 등반에 대한 걱정이 마음 앞에 선다. 비가 조금 약해지자 동행인 비박지 찾아본다며 먼저 나서고 나는 내리는 비나 보면서 빨리 멎기를 기원하는 수 밖에 별도리가 없다. 조금 지나 동행인이 돌아 왔고 비박지를 찾아 우측 숲지대를 지나 누운 바위 동굴에 도착하였다. 배낭을 풀고 메트리스를 깔고 긴 바지에다 오버복 상의를 입고 앉아서 밖을 바라보니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바람은 위와 아래에서 불고 바람소리가 귀에 따갑다. 빗물이 고여서 밑으로 떨어져서 물통 들고 가서 빗물을 받았다. 바람이 너무 심하여 개스 버너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바람 잦기를 기다리며 그저 비 내리는 설악산의 정경이나 하염없이 쳐다보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반찬 봉지에 보니 아까 추락먹은 것으로 인해 라면 봉지가 터져 있어서 생라면이나 씹으며 허기를 달랜다. 햇반과 봉지 카레를 아까 받은 빗물에 데워서 저녁을 먹는다. 동행인이 깔개를 꺼내 놓고 앉았다가 잠시 일어선 사이 부는 돌개바람으로 깔개는 하늘 위를 날며 춤을 추고 우리는 어어어 소리만 내고 어쩌지 못한다. 남은 더덕주를 마시며 가는 여름을 생각한다. 식사 후 별 할 일도 없어 침낭 커버 속으로 들어가 뒤적이다 눈을 잠깐 붙였을까 다시 바람 불고 그 바람소리는 우우우하며 우는 소리인것도 같고 하강기류가 올라와 우리를 공중부양 시키는 것도 같고 또 아까 먹다만 라면봉지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자꾸 나서 신경을 쓰게 만든다. 아마 조그만 들쥐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짐정리하여 배낭 안에다 넣고 잠을 청하지만 밤새 들리던 밤바람 소리에 서로 몸을 뒤척이고 급기야는 침낭 안으로 들어와 귀를 감싸도 지독한 바람 소리는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아침나절 바람이 잦아들어 조금 잠을 청했다.

  셋째 날(누운 바위 동굴-침니-동굴 통과-크랙등반-숲지대 워킹-하산)

  밤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은 날씨에 따가운 햇살. 햇반에 북어 봉지국. 서로의 패트병에 남은 물을 물병에 넣으니 각자 2/3 정도가 된다. 동행인 더운 날씨 때문에 물 걱정을 하고 한편으론 책자를 열심히 들여다보니 오늘의 출발은 이 누운바위 동굴을 출발하는 것이 시작인데 빠져나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 동행인이 아침에 깔개 날라 간 지점 배회하다 깔개 찾아 돌아오고 다시 보니 침낭주머니가 안 보인다고 한다. 짐을 정리하고 출발. 배낭을 벗고 태고적 인고의 출산을 생각하며 한편으론 덩치가 큰 사람이 이곳을 빠져 나올 수 있을까도 생각해본다. 좁은 침니가 앞으로 보이고 침니를 통과하니 그 아래 좁은 동굴이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매우 좁은 바위 틈을 빠져 나와 보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책을 보고 주변에 위치한 좁은 침니를 넘어 살펴보지만 그곳엔 조그마한 공터만 있고 아래로는 빽빽한 숲 지대이며 위로는 등반해야될 지점이 보여서 다시 원점으로 향한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위로 올라가서 보니 아래의 커다란 바위에 가려서 못 봤던 하강볼트가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위치한 곳에 슬링이 하나 매어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확보용이었던 것이다. 하강을 하고 다시 주름바위 및 넓은 크랙이 나온다. 넓은 크랙에서 동행인 결국은 오른쪽 릿지화 밑창마저 떼어버리고 이젠 완전히 양 발이 릿지화 창이 없는 상태에서 선등을 선다. 입구에서 프랜드를 설치하고 오르는데 나무 등걸이 보이는 중턱에서 배낭 무게로 인해 끙끙거리며 애를 쓴다. 불쌍해라. 우리의 선등자. 손등과 팔목은 프랜드 설치하느라고 긁힌 자국이 역력하고 게다가 바닥 창이 없는 릿지화로 등반을 하려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나무 등걸에 확보를 하고 다음 위의 테라스 큰 나무쪽으로 등반한다. 작은 바위들이 겹쳐진 지대에 크랙 등을 이용하여 15미터 정도 오른다. 그리고 루프 아래 쌍 볼트에서 10미터, 큰 소나무에 줄 걸고 20미터 하강을 하니 좌측의 숲지대가 나타난다. 날씨가 덥다. 숲지대 벽면으로 혹시나 간 밤 내린 빗물이 벽면에 흐르지나 않나 살펴보지만 물기만 머금은 바위 벽면만 보고 달랑대는 물통을 바라본다. 덮다. 바람이라도 불면 좀 나으련만 훅하니 오르는 여름 열기에 몸은 움추려 들고 숲지대를 지난다. 가까이 보이는 봉오리들이 나드리길의 마침을 알리고 있었고, 한참이나 숲지대를 우회했건만 등반로는 보이지 않고 잡풀만이 정강이를 스친다. 결국은 숲지대 우회로를 찾아서 크랙 및 슬랩을 트래버스를 해야하는데 노란 표시는 보이지 않고 내원골 족으로 하산을 결정한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찌하랴. 산은 늘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우리가 다시금 시간을 내서 찾는 수 밖에 별반 도리가 없다. 남겨둔 물로 목을 축이며 한편 여름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잡풀 속 헤매다 길 찾고 골짜기 시원한 물 마시며 나오니 다시 덥다. 한편으론 우리가 올랐던 울산바위 쪽으로 계속해서 시선이 가고 2박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음에는 하나가 되는 길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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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나절 주변의 어스름과 함께

하루를 연다. 7시 이전의 시각.

아직 주변은 어둡고,

가야 할 대상지에 대한 가는 생각과 움직임.

 

  늘상처럼 바람은 불고 있고,

의암 호수변 물빛 지나치는 차량들의

빛을 받아 수면이 반짝인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아침의 한기를 느끼며,

왜 가야하는가에 대한 끝없는 반문.

 

  말없는 몸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하고,

오름짓의 반복을 통한 일상성의 시작.

눈이 내려 길은 미끄럽고,

군데군데 보이는 얼음더미와

다시금 이는 바람의 움직임.

뒷 편으로는 춘천의 이른 아침 풍경이 함께 하고,

절에 위치한 계단 부분에서 잠시 쉬다가

물 한 모금 마시고,

깔닥거리며 다시금 오르다가

왜 산에 오르는가에 대한 자문

누군가의 말처럼, 산이 거기 있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동인이 오르게 했을까.

 

  삶이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을,

일상성 속에서의 스스로의 반추인 것을,

거친 숨을 몰아 쉬며서 자신의 살아있음에 대한

스스로의 느낌.

때때로의 어려움,

꿈꾸고 움직이는 자의 즐거움.

여러 상상을 통한 즐거움.

 

  산정.

가까이는 까마귀 원을 그리며

울며 날고 있고,

멀리서 올라 오는 개 짖는 소리.

차소리. 새 울음.

주변 겹쳐져 보이는 산들의 풍광.

춘천이라는 자그마한 도시.

불 빛 받아 반짝인다.

해는 이제 어스름을 걷고

떠오르기 시작하고.

추위에 떠는 자

밝은 햇살 다시금 쳐다 보고,

올랐던 길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내려간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하산시 다리의 힘은 더욱더 들어가고

군데군데 놓여진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 간다.

 

  의암호에서 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질 때

눈길 위로 터덕거리며 걸을 때

산행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2003.01.0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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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나절 시립화장터에 갔었지.

간 밤의 추위보다는 누그러진 날씨였지만

굳어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오히려 더한 한기를 느꼈네.

 

  화장하기 위해 관을 밀어 넣는

순간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고,

문득 김천 화장장에서 그렇게 보낸 동생 생각이

떠올라 아침나절의 서글픔이 한동안 지배했었네.

열매가 툭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세상에서의 삶은 허망한 것이고,

덧없는 것일까를 생각하네.

지상에서의 육신의 고달픈 삶을 연상하고

사후의 세계에서의 안녕을 생각했네.

 

  알 수 없는 슬픔은 연이어 밀려 오고,

그리고 진혼미사곡(레퀴엠)을 생각했었네.

너무나 낡은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로울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며,

괴로움을 이기고 삭힐까.

머리 속으론 미완성의 모짜르트 레퀴엠의 선율을 떠올리고,

 

  아침 나절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육신이 몸이 재로 되는 화장장에서의

현실을 직시한 역설일까?

 

집에 들어가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2악장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나 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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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에 나와서 신입생 배반 자료 등 밀린 것 하다가

모짜르트 교향곡 39번의 2악장을 들으면서 잠깐 상념에 빠진다.

 

  열심히 듣고 생각했던 그때의 모습이 눈 앞으로 어른거리고

현재의 내 모습과 겹쳐져 버리고

그때의 모습에서 얼마만큼이나 더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했는지,

그 때의 패기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

오히려 나는 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

닌지
스스로 묻는 저녁 나절.

 잡념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뒤엉킨 실타래가 되어 버린다.

 그려 왜 이렇게 바쁘게 살지 생각을 하다가

다시 모짜르트를 들으며 그것이 매개가 되어

잡념의 나래를 펼치고.

그 때의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지휘자 므라빈스키의 39번은

상큼했었네. 2악장 주선율이 들리고,

아름다움, 정열, 애수어림 이러한 것들이

내 속에 녹아 들어 있음을 느끼네.

 

아.름.다.운.넓.은.마.음.가.지.고.세.상.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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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작가가 인식한 것 중 어떠한 것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수단이다. 강운구는 신문사의 사진기자를 거쳐 75년 언론사태로 해직된 이후 가장 한국적 질감의 사진을 남기는 사진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세마을의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이다.
이 세 마을은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의 황골, 인제군 북면의 용대리와 전북 장수군 읍의 수분리이다. 대체적으로 사진에 나타난 시기는 1970년대 초 부터 말기까지의 풍경이다. 

  작가는 앞의 글에서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갈등, 혼란, 불화는 바뀜 보다는 급속하게 바뀌는 속도가 야기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군대 명령처럼 하달되는 "새마을 운동"의 영향아래 과거의 것들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버려야만 한다는 논리아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의 실정에서 보면, 사진은 사진으로서 남아 있는 화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한 편으로 생각한다.
소위 근대화라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이 땅에서 급작스럽게, 아니 상명하달의 70년대 군대식의 도시화는 전통적인 것마져도 잃어 버리게 만들고 방향성 없는 시대의 삶을 초래해 버렸다. 개화기 시대 이광수류의 사고와 다를 것이 없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그 뿌리가 같음을 느낀다. 

  유교라는 낡은 도덕율에 반기를 든 이광수는 과거의 것은 낡은 것이며, 또한 전면적으로 완전 부정의 대상이며 따라서 이 땅위에 있는 젊은이는 과거의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종족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결국 그러한 논리는 창씨개명, 징병강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는 자가당착의 논리쪽으로 연결된다. 

  기억한다.
아침 여섯시면 동회 사무실 확성기를 통해서 잠든 자들을 억지로 깨웠던 "새벽 종이 울렸네..." 하는 거친 노래 가사를.
그리하여 전통의 남향집 가옥들은 어느 날, 찻길을 중심으로 배치되는 기이한 가옥의 방향 구조를 갖게 됐고 초가 걷어 내고 슬레이트 얹고, 그 위에다 붉고 푸른 색의 뼁끼칠 하는 것이 그 시대의 모습이고 꼭해야만 하는 살풍경의 모습이었을까? 

  황골 풍경들,
돌담 위로 널려 있는 겨울의 빨래들.
포대기에 싸여 누군가를 기다리며 흙벽에 서있는 아이들.
처마 끝에 걸려 진 종자용 옥수수, 시레기, 기름병, 대바구니.
생업과 관련된 엿을 고는 광경,
  그리고 그들의 고된 삶의 한 징표인 터지고 갈라진 두 손, 갈라진 손톱.

  용대리,
  깊은 골짜기의 너와집. 주변 집 앞 텃밭의 도라지, 수수대가 있는 풍경.
한 편의 나무를 세우고 묶어서 그네를 타는 아이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기를 등에 업은 어머니의 모습.
아마도 어머니의 다사로운 체온은 아이에게 전달되리라.
토담집 부엌을 통한 음습한 내면 풍경. 서정주의 "자화상"이 연상이 되고 그리고 수분리의 초가들.
벽으로 스며드는 찬바람과 봉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군불 지피는 매캐한 연기가 어울려 한 편의 옛모습을 재구하여 본다.

  기억은 언제나 체험의 구속을 받지만 그것이 문화적인 함의를 지닐 때는 시공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오히려 사진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넉넉함을 느낀다. 오래된 미래에서 원시의 자급 공동체로서 라다크 마을이 그들의 생활을 유지했던 것처럼.

  잃어 버린 과거의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한 장 한 장의 사진을통해 나도 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작자는 또 이야기 한다. 사진은 슬프다고.
그것은 사진은 언제나 현재를 찍는다지만 어떤 것이나 저장하려고 필름에 영상을 비추는 순간에 과거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진은 슬프지 않다. 다만 사진에 화석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

  언젠가, "시선"을 냈던 후배에게서 들은 이야기,
양양 피사체가 되었던 그 공간이 엄청난 폭우로 인해 그 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의 것을 찾을 수 없는 도시화된 시대에서 과거의 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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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84년도 6월 말

복직 발령이 난 곳은 태백에 있는 모 중학교

춘천에서 9시 원주행 막차 버스를 타고 원주역에서

서성이다 11시 강릉행 기차에 몸을 싣고

새벽 두 시경 본 황지의 첫인상.

먼 산 너머로는 낮게 별들이 깔려 있었고(나중에 알았다

이것이 광업소 불빛인 줄을) 어둠에 묻혀 도시는 고요했다.

아이들과의 일과는 시작되고

거친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들어간 거친 고원의 도시에서

아이들은 긴팔입고 한여름을 보내고 있었고,

자신은 적응하지 못해 하숙생들과 함께

40여 분 떨어진 황지로 택시를 타고 나가서

굶주린 문화를 해결하곤 했었다.

 

그때 황지의 경기는 석탄산업이 사양화되기 이전이라

흥청망청이 여전했고 우리도 무슨무슨 정이라는 좋은 술집에

가서 술도 먹곤 했었다.

덧없이 가버리는 젊은 날의 시간을 안타까워하면서

 

  시내에 내려와서 술을 마시다가

버스는 이미 끊겨 버리고 기다리던 택시는 오지 않고

새벽 2시가 넘어

차가 없어서 허위적 거리며 산의 중턱을 넘으며(지름길)

숨차오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피내재 정상에서

노래를 불렀지.

“흘러흘러 세월 가면 무엇이 될까. 멀고도 먼 방랑길을 나홀로

가야하나.”

 한 편 그것은 무기력하게 보내는 자신의 감정 토로였을지도 모

르고.

노래 부른 후 담배 한 대 피고

가깝게만 보이는 시내와 꺼져 있는 하숙집 불빛을 멀리 보면서

젊은 시절을 박용철의 싯구처럼 “나도야 간다”라는 심정으로

보냈다.

 

황지에 “무랑루즈”라는 술집이 있었네.

무랑루즈에서 술을 마시고 못추는 춤 추다가

쑈타임이 되었지. 허옇게 분칠한 몇몇의 무희가 나와서

이 음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더군.

그 때 나는 생각했다네.

세상을 정조 잃은 밀랍인형이라고.

음악에 맞추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무희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왜 그런 생각이 났을까.

같이 갔던 분에게 곡을 물어 보니

그 음악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이었고.

 

그래서 차이코프스키 피협 1번을 들으면

황지의 음습했던 골목길 바람과 젊은 날의 내 방황이

함께 섞여 나오고 그것은 시간과 함께 엉켜져서

추억제를 만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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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9시 20분 시작인데 20여 분 시간을 넘기고 앞부분의 상황 설정도

모른 채 영화를 봐야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렇게 보았다.

의학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른바 빙의 현상을 소재로 한 히가시노 게

이코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비밀"을 보았다.

제목 비밀이 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죽은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으로 빙의된다는 얘기로 시작이 되고

아빠와 딸의 관계로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괴로운 주인공의 고

뇌.
마지막 장면에서의 반전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이 희생을 통해 완

성되는 것이라는 느낀다.

헤이스케(부)-나오코(처)-모나미(자)

  딸 모나미 역을 한 히로스에 료코의 천진한 눈 빛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은(10대나 20대 이겠지) 이 영화를 보고 정신적인 황폐

감을 느끼기도 하고 마지막 반전 장면에서 울기도 하고 했다던데


정이 메마른 지적 수준이 떨어져 반전의 의미를 간신히 알아차린 나

무덤덤하고 같이 갔던 사람에게 집에 가서 영화비 6,000원 돌려

달라고 했다.

내 삶이 결코 찌들지는 않았는데

너무 살면서 무덤덤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원래는 "I AM SAM"이 개봉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갔는 데 아니었고

문화의 달에 맞게 러시아 볼쇼이 합창단에다, 오페라의 유령에다 곳

곳에
포스터가 눈에 띄고 추운 날씨에다 알량한 주머니 생각도 한 그

런 날이었다.

 

  인터넷에서 "비밀"에 관한 글을 읽다가 우스운 이야기 한 토막.

  이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 했을 때 가장 적절한 배우 뽑기

가 있었고
여러 배우의 사진이 나왔고, 그 중에 하리수를 추천한 사

람의 글이 있었다.

  마지막 결말의 반전 부분에서 하리수가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라

고.
" 난 당신의 딸도 부인도 아닌 니 애비다."

  부연하면 딸의 육체를 빌린 아내의 정신은 남편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딸인 
모나미 행세를 했었고 결국은 설기현을 닮은 아이와 결혼

을 하게 되고 결혼한
후 딸을 만난 자리에서 딸이 지닌 꽃바구니 안

에서 곰인형(그 안에는 아내에게 준 결혼반지가 들어 있다. 미혼의

딸이 결혼 반지를 낄 수 없으므로 곰인형에다 넣고 항상 지니고 있겠

다고 하였다.)을 보고 또한 결혼한 딸이 턱수염을 쓸어 주는 행위를

통해 주인공은 그동안 아내가 자신을 위해 딸 역할을 했음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지.

한국 영화 "중독"은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려나.

예전에 나온 "고스트"가 생각이 나네. 언 체인지드 멜로디 선율이 떠

오르네.

Posted by 바람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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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시내 구경을 한다.

명동거리에는 젊은 사람들로 붐비고,

딸아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길거리 작품

전시한다기에 붙잡혀서 그렇게 나갔다.

정밀 묘사에, 조소, 일레스트레이션에 등등

그 중 일본 에니메이션 "센과 치히로..." "토토로"를

그대로 그려낸 기계적인 단순한 그림들로 인해 조금은 식상해 졌지

그것은 단순한 기능일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자신의 생각이 실리지 않아서 일까?

 

  그리고 한 때 시절을 돌이켜 본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

을 좋아했고
중학교 때 올라가선 미술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

지 못했다.

미술하는 것에 대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스스로가 포기해버리고.

마치 기형도의 시에서 보면 상장을 받아 들고 오면서

그것이 부모님께 부담이 될까 봐 종이배를 만들어 띄워 보내는 심정

이랄까.
가난한 유년 시절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추억들이 그의 시 편

에는 녹아들어 있다.

빨간 맨드라미같은 누이의 내복이나, 밤하늘의 별들이 튀밥처럼 커

다랗게 보이는 그런 배고픔의 원초적인 경험을 시로 풀어내고

결국은 심야의 한 극장에서 그렇게 그는 세상과 떠났다.

  왜 그가 생각이 났을까?

가난이야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어느 시에서 표현되었지만

가난하고 궁핍했던 어린 시절이 공유되어서 일까?

나도 그때 미술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됬을까를 생각하면서

머리 속은 온통 지난 과거와 미래의 모습들에 대한 단편적인 상념뿐.

   

Posted by 바람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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