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아침 나절 숙소 주변을 거닐어 본다.

전날 마신 술로 인해 아침 걸음이 느리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서 서술해 놓은 뮌헨의 풍경을 이곳에서 다시 떠 올려 본다.

감수성이 짙은 우수에 젖은 문체,

고등학교 시절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들.

차라리 귀국하지 않고 뮌헨에서 계속 생활했더라면

일상에서의 그녀의 권태로운 삶과 먼 곳에 대한 그리움도 차츰 가셔졌을 것이고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검은 눈매의 우수에 젖은 그녀가 표현했던 뮌헨의 황색 하늘과 안개비는 보이지

않고,
한편 그녀의 딸 정화가 우리와 동갑내기인 것을 기억한다.

멀리 이자르강은 보이고,

시대를 앞선 여성의 삶은 험난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아리랑 선율에 맞추어 흘러나오는 사진 자료.

“이렇게 살았군요”를 보면서 느낀 이역만리에서의

광부와 간호사로서의 고단한 삶도 떠오른다.

 

 평평하고 너른 땅.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고

자전거 전용 도로에 캠핑장에 모여든 행락객 무리가 휴가철임을 알린다.

멀리 알프스의 산군들이 보이고

버스 안에선 로엔그린 중 “혼례행진곡”이 나직이 울리고

저 높은 푸른 하늘에 행글라이딩하는 모습이 보인다.

퓌센 가는 길.

 

 그리하여 백조의 성에서 자만심이 강한 한 사내를 다시 만났다.

바그너.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베트남 융단 폭격을 할 때 나온 “발퀴레”.

종종 들었던 “탄호이저 서곡”이 우선 떠오른다.

내가 존경하는 그의 여성 편력과 반대로 싫어하는 삶의 행적.

음악과 시 그리고 무대를 하나의 극으로 통일한 악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에의 호기.

바그너의 사랑이야기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장대한 작품으로 인해 쉽게 접근하지를 못했다.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니벨룽의 반지”만 하더라도 사흘 간 지속을 하고,

한때 DVD 판으로 “반지” 10장이 나왔을 때 구매를 심각하게 고려도 했었다.

말하자면 음악적인 면보다는 외적인 측면으로 인한 거부감이 더 강했던 것.

그러나 강력한 예술적 후원자를 만난 그의 삶은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트비히 2세.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림을 통하여 그의 부인이었던 왕비의 24세 때의 젊은 모습까지.

그리고 머리 속으로 떠올렸었지.

젊은 나이에 자살한 고음악 연주가 데이빗 먼로의 “막시밀리안 1세 시대의 궁중음악”을.

우리의 종묘 제례악처럼 단순 명료한 악상의 전개와 그것으로 인한 단아한 느낌을 주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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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루트비히 2세.

바그너의 악극에 심취한 아니 그것을 왕궁에 펼쳐 보려고 했던 사내.

그것을 통하여 표현된 벽화.

결국은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그 성에서의 짧은 삶.

백조의 노래. 최후의 작품을 의미하는 것.

열정(passion)이 지나치면 수난과 고난(PASSION)이 되는 것인지?

 

게르만 신화 속의 상상력.

신화. RING. 삶의 편력. 코지마.

바그너에 대한 단상.

 

한국에 돌아가면 바그너 곡에 관심을 갖고 들어 보겠다고 했지만

그저 말러의 몇 곡만 들었다.

 

여름날 천둥치고 비는 내린다.

성문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여름날 오후 한나절 풍경.

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풍경.

짙은 녹색으로 다가온다.

정지해 있는 시간들.

Posted by 바람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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